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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교통카드를 미리 찍는 노인을 보면서 - 할아버지 해커

08/02/16 15:38(년/월/일 시:분)

2호선 강변역에서는 지하철에서 버스로 환승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도 거기서 버스로 환승해서 집에 오는 길이었는데.

강변역에서 많은 사람이 탄 후에는, 한동안 내릴 일이 없다. 그렇게 조용한 버스 안에서 삑- 하고, 교통카드 내릴 때 찍는 소리가 났다. 버스기사가 뒤를 돌아봤는데, 어떤 할아버지가 버스카드를 찍고 있었다.

이 할아버지 지금 뭐 하는거야? -_-+

요즘 버스는 교통카드를 두번 찍는다. 탈 때 한번, 내릴 때 한 번. 그래서 멀리 탈수록 요금을 더 낸다. 근데 이 할아버지, 내릴 것도 아니면서 슬며시 교통카드를 미리 찍었다.

버스기사가 큰 소리를 쳤다. "할아버지 어디까지 가세요!" 그러나 할아버지는 여전히 모르는 척 하고 않았다. 금방 내릴 기미도 보이지 않았고, 대답도 하지 않았다.

버스기사는 다시 큰 소리를 쳤다. "그걸 먼저 찍으면 어떡하세요!" 할아버지는 미동도 없었다. 교통카드를 나중에 찍는건지 몰랐다고 변명하지도 않았고, 실수였다고 사과하지도 않았다. 정말 뻔뻔했다.


그런데 이건 할아버지가 이길 싸움이었다. 버스 안에 기사는 한명 뿐이었고, 할아버지 하나 때문에 운전을 멈추고 가서 따질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떻게 시비라도 붙으면 버스를 세우고 주먹다짐이라도 하겠지만, 이건 상대가 할아버지인데다가, 이 할아버지, 화도 안 낸다.

결국 버스기사는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다음부터 그러지 마세요!"


생각해보니까, 현재 교통카드 찍는 시스템에 허점이 있긴 있다. 오늘같은 경우 승객이 적고 조용했기 때문에 할아버지가 삑- 하고 교통카드 찍는 소리가 들려서 알 수 있었지, 사람이 많고 복잡한 시간대라면 슬쩍 먼저 찍어도 여간해서는 알아채기가 힘들 것이다.

이것도 일종의 해킹이려나 해서, 이 사회의 헛점을 파고드는 할아버지 해커의 이미지를 떠올렸다.


이 할아버지 해커는 이런 모습이다. 첫째로 표정이 없다. 화를 내지고 않고,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아마 젊은 시절에 사회의 쓴맛을 너무 처절하게 봐서 마음 한구석이 부서져버리지 않았을까. 그래서 감정이 마비되고 오로지 돈만 쫒는 속물이 되버렸다거나.

죄책감도 없고, 양심도 없고, 무엇이 잘못인지도 모른다. 나에게 단돈 200원이라도 이익이 된다면 현재의 교통카드 시스템이 무너져도 상관없다. 나에게 이득이 된다면 법망을 교묘히 빠져나가서 탈세를 해도, 횡령을 해도 상관없다. 그건 내 잘못이 아니다, 시스템이 잘못된 거지.

이런 노인에게 "당신이 잘못했다"고 설득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설령 법원의 징역 판결을 받아서 감옥에 가더라도 자신이 잘못되었다는 걸 납득하지 못할 것이다. 아니 눈 앞에 뻔히 빠져나갈 구멍이 있는데, 그걸 왜 안 빠져나가? 안 빠져나가는게 바보지. 나는 그저 돈을 절약했을 뿐이야. 그저 조금 해먹었을 뿐이야. 남들 다 하는 거 나도 했을 뿐이야.


어느 시스템에나 헛점은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헛점을 파고드는 해커들 역시 언제 어디서나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청년 해커와 할아버지 해커의 가장 큰 차이점은, 청년 해커는 그래도 타협의 여지가 있지만, 할아버지 해커의 경우는 타협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말이 통하질 않는다.

나도 이해를 한다. 보통 35~40세가 넘어가면 학습능력이 매우 떨어지기 때문에, 노인에게 뭔가 새로운 걸 가르치는 것은 아주 어렵다. 나이를 먹으면 뇌가 굳어진다. 그래서 노인은 지금껏 살아왔던 방식으로만 남은 생을 살아갈 것이다.

나는 노인이 살아왔던 한국의 현대사를 돌이켜보면서, 정말 그 시절에는 그렇게 살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이해를 하려고 한다. 박정희 정권, 전두환 정권, 정말 치열했던 시절. 그래서 그런 인격이 형성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겠지.

나는 새삼, 요즘 한국도 고령화사회에 진입했다는 기사를 떠올리며, 앞으로 당분간은 방금과 같이 버스카드를 미리 찍는 할아버지 해커들의 시대가 되지 않을까, 화를 내지도 않고,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도 모르고, 타협도 되지 않는 노인들이 많은 나라에서 무력한 젊은이로서 살아야 하는게 아닌가 생각했다.

http://www.xacdo.net/tt/rserver.php?mode=tb&sl=995

  • 제목: 이 나라는 노인들을 위한 나라다
    Tracked from 작도닷넷 08/04/09 11:58 삭제
    이번 18대 총선에서도 지난 대통령 선거와 마찬가지로 한나라당이 압승했다. 이미 예견된 결과였고, 예상을 실제로 확인한 정도였다. 이 나라는 늙어가고 있다. 고령화사회에 진..
  • 태공 08/02/16 21:07  덧글 수정/삭제
    마치 이 글은 다른사람의 글같군.
  • 민트 08/02/17 01:52  덧글 수정/삭제
    지금의 30대 정도가 노인이 되는 3-40년 후에는 좀 나아질 것 같습니다. 버스를 거의 안타서 저런 노인은 아니지만 그것 말고도 젊은 사람이 저질렸으면 입이 떡 벌어질 후안무치의 노인들을 많이 봐와서.. 이해가 되기도 하지만 참 짜증납니다 ㄱ-
  • 해달 08/02/17 05:19  덧글 수정/삭제
    나이가 들어도 학습능력은 떨어지지 않습니다. 무언가를 습득하는 능력은 젊은이들과 비교해도 별 다를 바가 없죠. 다만, 자신이 습득한 것을 다시 재생(기억 등)해내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릴 뿐입니다.
    노인들이 자신들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은 부족한 학습능력의 공백을 메꾸는 것이 아닙니다. 좀 더 효율적으로 상황판단을 내리기 위해 사람들은 편견을 만들어내는데 나이가 많은 수록 이 편견들이 많이 축적되어 있어서 외부 자극에 대해 완고하게 반응하게 되는 겁니다.
    ...가 좀 더 맞는 말일 것 같네요.
  • Vincent 08/02/18 05:52  덧글 수정/삭제
    저는 37세이지만 학습능력이 떨어지고 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데요? 단지 그동안 쌓인 나름의 식견이 편견으로 석화하여 새로운 걸 배우는데 장애물이 되지는 않을지, 항상 조심하며 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 xacdo 08/02/18 22:50  덧글 수정/삭제
    나이가 들수록 완고해지는게 학습능력이 떨어져서가 아니군요.
  • jamie 08/10/18 14:20  덧글 수정/삭제
    나도 그런적있는데....첨에 많이들 종종그랬는데....
    머 양심찔려 나중엔안했지만
    노인을 나쁜사람사람 취급한건 좀 심하네요 - -
    그만큼 노인들이 보기에도 엉성한 교통체계라는거죠.
    법이 엉성한 나라에서 아무리 양심을 키지고 살라고하면
    다들 양심으로 법없이도 잘삽니까?
    노인카드도 안만들어주는 노인복지도 별로 없는나라에서
    카드좀 일찍 찍었다고 그버스기사님도 팍팍하시네.
    그노인 무안하셨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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