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도닷넷 블로그
작도닷넷 블로그

나의 작품들 - 스토리

사랑해요

07/03/26 14:01(년/월/일 시:분)

사람은 자기가 한 말에 사로잡히는 경향이 있다.

오래된 커플을 보자. 두 사람은 서로의 좋은 점과 나쁜 점을 충분히 알았고, 이제는 좋은 점보다는 나쁜 점이 더 크게 보이는 시기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헤어지자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사그러들곤 한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이 헤어지지 않는 이유는 단순히 "헤어지자"는 말을 안 했기 때문일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남자가 "헤어지자"는 말을 먼저 꺼냈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그는 자기가 한 말에 사로잡힌다. 아직 사랑하는 마음이 남아있다 하더라도, 자기가 자기 입으로 꺼낸 말에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에 그는 어쩔 수 없이 헤어져야만 한다. 여기서 "헤어지자"는 말은 그들의 상황보다도, 감정보다도, 이성보다도 선행한다. 그만큼 말에는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

그런데 사람은 때론 자기 자신도 납득하지 못하는 말을 내뱉을 때가 있다. 도대체 내가 왜 그런 바보 같은 말을 했을까? 내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헤어지자"고 했지? 자기 자신이 한 말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사람은 그 말에 책임을 져야 하고 그 말에 최면에 빠져 그 말이 시키는 대로 움직인다. 말은 그 자체로 사람을 움직이고, 조종하고, 지배한다.

그런데 잠깐만, 호흡을 멈추고 차분하게 생각해보자. 내가 왜 그런 말을 했지? 하고 후회하기 전에, 이런 생각을 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아니 도대체 내가 왜 그런 말을 하게 되었을까? 내 짧은 세 치 혀를 움직이는 건 도대체 누군가? 어쩌면 내가 아닌 누군가가 내가 어떤 말을 하게 시키는 것 같지 않은가?

나는 타인의 발성 근육을 움직일 수 있다.

원리는 아주 간단하다. 보통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자기 앞에 앉은 사람의 행동을 조금씩 따라하기 마련이다. 앞사람이 하품을 하면 어쩐지 하품을 따라 하게 되지 않는가? 옆사람이 왼쪽 볼을 긁는 것을 보면 왠지 나도 모르게 왼쪽 볼을 긁적이고 있기도 하고. 이런 것들이 쌓이고 쌓이면 어떤 일련의 행동이 타인에게 전염이 된다. 그래서 오래된 부부는 서로의 행동이 비슷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상대방의 눈 앞에서, 일련의 발성 근육의 움직임을 전염시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랑해요"라고 말하게 하려면, ㅅ,ㅏ,ㄹ,ㅏ,ㅇ,ㅎ,ㅐ,ㅇ,ㅛ, 총 9개의 발성 근육의 움직임을, 입둘레근, 입고리당김근, 큰권골근, 작은권골근, 위입술올림근, 입고리올림근, 입꼬리내림근, 아래입술내림근, 턱끝근, 볼근, 설골설근, 경돌설근, 이설근, 구개설근... 등의 미세한 근육의 움직임을 긴 시간을 들여 무의식적으로 상대방에게 전달해야 한다. 이것은 매우 피곤하고 고통스러운 작업이다.


보통 "사랑해요"라는 짧은 4음절의 단어를 말하게 하는 데만 꼬박 5시간이 넘게 걸린다. 나는 정말 오랜 시간을 들여 침착하게 인내심을 가지고 무의식적으로 수많은 근육의 움직임을 통해 동조시키고 있다. 나는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나의 발성 근육을 온 힘을 다해 움직이고 있다. 나는 여유롭게 웃고 있지만, 실은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흐르고 있다.

순간 호흡이 멈추고 그녀의 검은 눈동자가 나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입고리당김근이 살짝 올라가고, 두 치아가 가볍게 닿고, 혀가 아래쪽으로 향하며, 무성음의 어떤 강한 소리가 작은 틈새로 빠르게 빠져나오려고 하고 있다. 이것은 아마도 'ㅅ'으로 시작하는 어떤 단어일 것이다.

"사랑해요."

그녀는 자기가 말해놓고도 어리둥절한 표정이다. 내가 왜 이런 말을 했지? 정말 바보 같아. 만난지 5시간밖에 안 되는 남자에게 이런 짧은 4음절의 단어를 말하게 될 줄은, 그녀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부유하는 의식의 건더기를 아무리 뒤져봐도 그녀가 왜 이런 바보같은 말을 내뱉었는지 실마리조차 발견할 수 없다. 분명히 자신이 한 말인데도 납득할 수가 없다.

"사랑해요."

나도 같은 말을 했다. 두 사람이 동시에 수십개의 근육을 정교하게 움직여서 4음절의 단어를 같이 발음했다. 두 사람의 발성 근육이 서로 완벽하게 동조한 것이다. 그리고 이 말은 그 자체로 사람을 움직이고, 조종하고, 지배한다.

사람은 자기가 한 말에 사로잡히는 경향이 있다. 그녀는 사랑에 사로잡혔다.



http://km.naver.com/list/view_detail.php?dir_id=50201&docid=31327049
인체 해부도

http://blog.naver.com/stargazor/50002295465
혀 근육의 운동

http://web.edunet4u.net/~ourbody/3-b.htm
머리의 근육

도올 김용옥 - EBS 논술세대를 위한 철학교실 - 제 2강 - 생각이란 무엇인가

http://www.xacdo.net/tt/rserver.php?mode=tb&sl=645

이름
비밀번호
홈페이지 (없어도 됩니다)

비밀글로 등록
작도닷넷은 당신을 사랑합니다.
태그: ,

[이전 목록]   [1] ... [1727][1728][1729][1730][1731][1732][1733][1734][1735] ... [2298]   [다음 목록]

최근 글

이웃로그 관리자 옛날 작도닷넷 태터툴즈 ©현경우(xacdo) since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