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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 출판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16/09/23 08:08(년/월/일 시:분)

이 책을 나오자마자 사놓고(2013년 7월) 몇 년을 묵혀두다가 이제야 봤다(2016년 9월). 내가 사놓고 안 읽은 동안 무라카미 하루키는 무려 4권의 책을 더 냈는데, 읽는 속도보다 쓰는 속도가 더 빠른 셈이다.

약간의 변명을 하자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는 술술 읽히지만, 소설은 그렇게 쉽게 읽히지 않아서였다. 실제로 그 동안 나온 4권 중 3권, 후와후와,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라오스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 는 다 읽었다. 에세이는 술술 읽었으면서 막상 소설을 읽으려고 하면 이상할 정도로 머리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크게 심호흡을 하고 "자, 어디 한 번 읽어볼까?" 마음을 잡아야 겨우 내용이 머리에 들어왔다. 그렇다고 재미가 없는 건 아닌데 문턱이 좀 높았다. 그래서 몇 번이나 앞 부분을 몇십 페이지 읽다가 자꾸 덜컹거려 그만두고 말았다.

이런 증상은 나만 겪는 문제는 아닐 것이다. 나와 같이 많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팬들도 동일한 증상을 겪을 것이라 생각한다. 내가 보기엔 독자만이 아니라 작가부터가 그럴 것 같다. 에세이야 "아무렴 어떠냐, 그냥 의뢰를 받았으니 써달라는대로 써줘야지" 하는 마음가짐으로 후딱 써서 돈을 받고 잊어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소설은 의뢰를 받아서 쓰는게 아니라 정말 순수하게 자기가 쓰고 싶은대로 쓰는 것이라 정말 마음을 다잡고 썼을 것 같다. 아침에 일어나 1시간 정도 조깅을 하고, 신선한 샐러드로 아침을 먹고, 깔끔하게 정리된 아이맥 앞에 정자세로 앉아서 심호흡을 한 다음, 키보드에 손을 올리고 단어 하나하나를 골라가며 온 정신을 완전히 집중에서 천천히 조심조심 썼을 것이다. 그러니 읽는 입장에서도 그만큼 긴장이 되고 부담이 되는 게 아닐까.


하여튼 나도 사놨으니 읽기는 해야겠고, 뭔가 무라카미 하루키 치고는 오랜만의 리얼리즘 계열의 소설이기도 해서 궁금하기도 했다. 리얼리즘이 뭐냐하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는데

1. 리얼리즘 계열: 그나마 현실적이고 납득할 만한 소설. 예) 상실의 시대
2. "하루키 월드" 계열: 도대체가 납득할 수 없는 작가 혼자만의 세계에서 떠도는 소설. 예)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물론 "하루키 월드"도 재미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꿈을 꾸듯 아련하게 흘러가다보니 갈피를 잡지 못하는 느낌이 든다. 작가 본인은 이런 "하루키 월드"를 본인의 정체성이라 믿어서 절대 포기할 수 없겠지만, 소설의 판매량이나 독자들의 평가를 보면 리얼리즘 계열이 높은 평가를 받고, 나 또한 그쪽이 더 좋다.

본인도 이런 평가를 아는 건지, 최근 들어서는 리얼리즘과 하루키 월드를 적당히 타협하는 행보를 보여왔지만, 아무래도 본인에게는 리얼리즘이라는 옷이 불편한지, 1Q84 같은 경우에도 어쩐지 소설의 전개가 막힌다 싶으면 자꾸 하루키 월드 쪽으로 회피하는 듯한 인상을 받아서 좀 실망스러웠다.

그런 와중에 나온 이번 소설, 제목도 참으로 긴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는 오랜만에 온전한 리얼리즘 계열의 소설이라, 자꾸 하루키 월드로 빠지던 습관도 없겠구나 싶어서 참 기대가 되었다. 자, 과연 이번에는 딴청 피우지 않고 올곧게 끝까지 현실감각을 버리지 않고 완주할 수 있을까?

자, 여기서 잠시 쉬어가자. 이 아래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다.


책 구매정보는 아래 네이버 책을 참조하기 바란다. 나는 전자책을 좋아하지만 우리의 깐깐한 무라카미 하루키 할아버지께서는 고집스럽게 종이책을 고수하고 계십니다. 재미있는 건 책이 잘 팔리지 않는 영어권에서는 전자책을 내주면서요. 그래서 저는 어쩔 수 없이 종이책을 사서 북스캔을 뜬 다음, OCR로 문자인식을 해서 TTS 읽어주기로 들었습니다. 운전하면서 들을 수도 있고, 버스 안에서도 눈으로 읽으면 멀미가 나는데 귀로 들으면 멀미가 안 나더라구요. 좋죠.

북스캔하는데 돈도 책값과는 별도로 더 들었고, PDF 변환하고 OCR 하고 TTS 돌리는데도 개인적인 품이 더 들었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할아버지! 영어권 말고 아시아권도 전자책으로 내주세요. 어차피 잘 팔리니까 타협의 여지는 없겠습니다만(영어권은 독자가 많아서 타협적으로 전자책을 내준다고 생각해서요), 저같은 독자도 있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고생고생해서 디지털화 하고 있습니다.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7248632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이 소설에서 놀라운 순간은 두 군데였다.

1. 사라가 순례를 명령하는 순간
2. 쓰쿠루가 순례를 마치고 찌질해지는 순간

1번은 무라카미 하루키가 인터뷰에서도 밝혔다. 원래는 짧은 단편 소설을 쓸 생각이었으나, 그 단편 소설이 대충 끝나려는 순간 사라가 뜬금없는 얘기를 쓰쿠루에게 한다. 그것은 권고의 성격을 띄었으나 사실상 명령에 가까웠다. 나는 그 순간이 너무 뜬금없어서, 머리 위에 물음표 마크가 뜨는 것 같다. 마치 헌터X헌터에서 이제 슬슬 작품의 결말인가 하는 순간, 비욘드가 등장하며 더 큰 암흑세계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아니 이러면 얘기가 훨씬 길어질텐데?

끝날듯 하면서 끝나지 않는, 현실인듯 환상인듯, 실제 벌어진 사건인지 아니면 단순한 생각인지 흐릿한 경계를 끝까지 추적하는 게 무라카미 하루키의 강점이다. 이 소설도 사실은 단편으로 끝났어야 할 소설이 뜻하지 않게 장편으로 길어지면서 벌어지는 일종의 소동이다. 이 지점부터 이 소설은 예상치 못한 에너지를 가지고 정면으로 돌진하기 시작한다. 아니 무라카미 하루키가 이렇게 장르 소설같은 박진감을 주다니? 오래살고 볼 일이었다.


http://finding-haruki.com/716
스티븐풀: 신작 <다자키 쓰쿠루>역시 <태엽감는새>와 같이 단편 소설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고있는데요.
하루키: 처음 이 이야기를 단편으로 쓰기 시작했을 때는, 오로지 36세의 고독한 한 남자의 인생에 대해 그려보고 싶은 마음 뿐이었어요. 결국 그의 비밀스런 이야기들은 모두 풀리지 않았지만, 그 미스테리는 미스테리함 속에 계속해서 남겨 두고 싶었어요.
스티븐풀: 무카라미씨의 여성 캐릭터들은 보통 이야기를 주도적으로 이끌어 나가는 성격의 인물은 거의 없다고 여겨지는데요.
하루키: 제가 단편 소설로 이야기를 쓰고 있을 때 였어요. 쓰쿠루의 연인인 사라는 그에게 그 당시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찾아 떠나라고 말하죠. 그래서 쓰쿠루는 나고야로 가게 되고 옛 친구들을 찾아가게 됩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였어요. 사라가 제게 와서 나고야로 가서 무슨일이 일어났던 건지 찾으라고 말했죠. 소설을 쓰는 중에 제 캐릭터들은 제게 와서 무엇을 어떻게 하라고 얘기를 합니다. 소설과 제 실제 경험이 동시에 일어나죠. 패러럴(parallel)로 말이죠. 그래서 그것이 바로 소설이 되는 거에요.

http://finding-haruki.com/739
하루키 15년 뉴질랜드 리스너(Listner)지 인터뷰 - Dream Catcher
Listner: 근작 <색체가 없는 다자키 쓰크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이하 <다자키 쓰쿠루>, 의 여주인공 사라에 대해서 얘기해보죠. 그녀는 이야기의 중반 즈음 쓰쿠루로 하여금 그가 학창시절 친구들에게 절교 당한 이유를 알아보러 나고야로 떠나라고 얘기합니다. 그녀는 "당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살 수는 없다"고 얘기합니다.
하루키: 저도 매우 놀랐어요. 전 단지 친구 그룹으로 부터 동떨어지게 된 한 남자와 사라라 불리는 그의 여자친구가 등장하는 짧은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는데, 갑자기 사라가 쓰쿠루에게 나고야로 가라고 말했어요. 전 그녀가 그런 말을 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쓰쿠루와 작가인 저에게 동시에 얘기한겁니다. 전 그렇게 계속 이야기를 써나갔고, 그렇게 소설이 된겁니다.



- 제 2의 상실의 시대?

심지어는 어떤 느낌까지 들었냐 하면, 야 이거 이러다가 제 2의 상실의 시대가 되는 거 아닌가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상실의 시대는 무라카미 하루키 최고의 흥행작으로, 단카이 세대의 대학생 시절, 그 혼란스러운 시절의 아련한 향수를 자극하는 매력이 있었다. 이 소설도 고등학교 시절 아주 친했던 친구들로부터 이유도 모른채 절교를 당하고, 한참이 지난 30대 중견사원 시절에 그 절교당한 이유를 찾아 순례를 떠나는 내용이다. 그래서 상실의 시대의 대학생 감성이 오히려 고등학생 감성으로 더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이번에는 고등학생의 풋풋함만이 아니라, 30대 직장인의 적당히 찌든 감성까지 더해져 좀 더 입체적인 느낌이 들지 않을까 싶었다. 게다가 16년 전 과거를 추적해가는 일종의 추리물이라니, 과연 비밀은 무엇일까? 두근두근하지 않은가.

물론 본격적인 추리물이라고 하기에 이 소설은 매우 단순한 구조를 가졌다. 누구나 납득할만한 수준으로 평이하게 풀어냈다. 그래도 나는 이런 식의 장르적인 재미를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에서 경험할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게다가 그 단서가 상당부분 주인공의 꿈과 그에 따른 어렴풋한 느낌에서 비롯했다는 것이 하루키 다웠다.

자, 그럼 순례를 마쳤다. 모든 비밀이 명쾌하게 풀렸다. 그럼 어떻게 끝날 것인가? 보통 이런 경우에는 주인공이 조금 성장하면서 끝난다. 어린 시절에 받았던 큰 충격으로, 그남자 그여자의 사정의 아리마처럼 겉으로는 친절하지만 속으로는 마음의 그늘을 가진 남자가 되어 버렸다. 여기서 블랙 아리마를 제거하면 화이트 아리마만 남아서 평생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 하루키식 성장물?

순진하긴. 그렇게 삶이 호락호락할 것 같으냐. 주인공 쓰쿠루는 고등학교 시절의 자아를 찾아 떠나는 여행에서 여러 오해를 풀었고, 덕분에 마음의 짐을 벗었다. 마음 한 구석에 드리우던 검은 그늘을 어느 정도 떨쳐낼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의 감정이 고등학생 시절에서 조금도 성숙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이제 그 트라우마가 겆히자, 쓰쿠르는 딱 고등학생이나 할 법한 찌질한 연애를 하기 시작했다. 애인이 모르는 남자와 손을 잡고 길을 걷는 것을 우연히 보고 질투하고, 그 질투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지적하지도 못하고 겨우 간접적으로, 수동적인 태도로 공격이 아닌 듯 공격한다. 그것도 모자라 자기 마음이 답답하다는 이유로 새벽 4시에 전화를 걸어 사랑한다고 말하고, 만나기로 약속한 전날 저녁에 애인이 거는 전화를 안 받기도 한다.

보통의 30대 남자라면 이런 식의 연애는 20대 시절에 졸업해야 했을 것이다. 마음의 그늘이 없어진 것 까지는 좋은데 너무 어린아이처럼 연애하는 것 아닌가. 이래서야 성숙한 30대 커리어 우먼과 어떻게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겠는가.

물론 이러는 편이 적당히 성숙하는 것보다 현실적이긴 하다. 포켓몬으로 치면 억눌린남이 찌질남으로 진화했습니다! 랄까. 나는 사실 많은 성장물에서 마지막에 주인공이 너무 급하게 작위적으로 성장하는 느낌을 받았다. 아니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산뜻하게 뿅 하고 성장할 수 있겠는가. 차라리 이렇게 찌질한 편이 훨씬 그럴듯하긴 하다.

하지만 보기에 너무 짜증이 나는게, 아이고 기껏 애인이 마음의 짐을 덜어주려고 물심양면으로 보살펴줬건만, 그걸 저런 식으로 갚나 싶었다. 근데 사실 우리의 많은 연애가 저런 식이지 않나. 상당 부분 파멸적이지 않나.

여기서 우리의 주인공 쓰쿠루가 10대의 연애방식을 그만두고 30대의 연애방식까지 성장하려면 또 소설 한 권 분량이 더 필요하겠지만, 애석하게도 우리의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여기서 매정하게 소설을 끝내고 말았다. 물론 더 쓰자면 얼마든지 더 쓸 수 있겠지만, 솔직히 궁금한가? 뻔히 보이지 않는가?

쓰쿠루와 사라는 바로 깨질수도 있고, 조금 구질구질하게 지속될 수도 있겠지만, 결혼이라던가 하는 안정된 관계는 애당초 불가능하다. 쓰쿠루는 치유하기 힘든 상처를 다시 한 번 받을 수 밖에 없고, 이 상처를 어루만지고 다시 관계를 시작하기에는 어쩌면 고등학교 시절에서 30대 중반까지의 시간보다 더 오랜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이것은 이미 소설이 끝나기 전에 가능성으로서 충분히 그려졌다.


이게 참 현실적이긴 한데, 동시에 참 찝찝하기도 하다. 차라리 "냉정과 열정 사이"처럼 어린 시절의 풋사랑을 어른이 되어 다시 만나서 잘 되겠다는, 전혀 현실감 없는 결말이 차라리 더 위안이 될지 모른다.

하지만 이렇게 가혹하게 끝나버리다니. 고작 성장한게 찌질남이라니. 이래서야 어떻게 여자와 관계를 좋게 이어나가겠는가. 그래도 조금이나마 좋게 될 여지를 주면 좋을텐데, 그런 것도 없다. 가시나무처럼 다른 사람을 받아들일 여유가 없는 것이다.


가시나무 - 시인과촌장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에 헛된 바램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
내 속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 당신의 쉴 자리를 뺏고
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 숲 같네
바람만 불면 그 메마른 가지 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
쉴 곳을 찾아 지쳐 날아온 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
바람만 불면 외롭고 또 괴로워 슬픈 노래를 부르던 날이 많았는데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그래서인지 이 소설은, 발매 초반에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으나, 갑자기 끝나버린 불꽃놀이처럼 그 기세가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나는 그 이유가 중반의 파워풀한 장르적 재미와, 결말의 찝찝함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두 번의 덜컹거림이 이 소설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이 소설을 여러분에게 추천할 것인가? 나는 적어도 많은 성장물처럼 작위적이지는 않다는데 점수를 주고 싶다. 오히려 너무 현실적이어서 찝찝할 따름이다. 그리고 내가 말한 두 번의 덜컹거림, 중반부의 급가속과 후반부의 급하강을 재미있게 즐길 수 있다면 이 소설이 충분히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1Q84 4권은 언제 쓰실건지. 매우 기대하고 있습니다. 보나마나 태엽감는 새 4권같이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짧게 끝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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