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06/12/31 03:08(년/월/일 시:분)
장금이의 꿈 19화를 보다가.
주인공들이 항상 거치는 과정이 있다. 잠깐의 성공에 기뻐하며 철부지 짓을 하다가 된통 크게 당하고, 이를 발판삼아 나중에 더 큰 성공을 거두는 것. 주로 막바지에 클라이막스를 위해 쓰는 경우가 많은데.
나는 이 부분이 너무 불안해서 눈 뜨고 못 봐주겠더라. 왜냐하면 내가 그랬거든. 한 두번 그런 것도 아니고 항상 그래왔고, 거의 성격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정돈데.
예전에 가슴에 아무런 상처도 없이 매끈할 때는 이런 걸 봐도 별로 감흥이 없었다. 그러다가 살면서 가슴에 유리조각도 박히고 상처도 생기고 하다 보니까, 이렇게 예전 상처를 클리토리스 문지르듯이 살살 자극하는 게 나오면 막 불안하고 가슴 떨리고 눈물이 나온다니까.
이럴땐 괜히 옆에 있는 애꿎은 옷자락이라도 쥐어 뜯으면서, 손톱이라도 물어 뜯으면서, 아니면 연필 끝이라도 아작아작 깨물으면서 봐야지. 아 불안해 못봐주겠어. (그러면서 보기는 계속 본다) 예전에 허리케인 죠(내일의 죠) 볼때도 그랬는데.
내가 이런 것 때문에, 한동안 내 작품의 주인공이 못 되는 꼴을 도저히 두고 볼 수가 없었다. 항상 행복하게만 해주고 싶고, 상처없이 곱게 자라는 것만 보고 싶었어. 마치 다 내 자식인 양, 아름다운 것만 보여주고 무조건 잘 해주고만 싶었지.
지금이야 "원래 얘는 못 되는 캐릭터"라고 설정해놓고 말지만, 그래도 막상 걔가 잘 안 되는 부분을 쓸때는, 한 문장 쓰고 침대에 드러 눕고, 또 한참 괴로워하다가 또 한 문장 쓰고 그런다. (괴로우면 침대에 드러눕는 타입)
나도 박찬욱처럼, 유머가 전혀 안 섞이고 진지하게 주인공이 잘 안되는 부분은 가슴이 시려서 못 봐주겠어. 아무리 나중에 잘 될 걸 알더라도 마찬가지야. 박찬욱 영화가 항상 멀리서 지켜보는 관점인게, 작가 자신이 상처를 많이 입어서, 자기 상처를 자극하기 싫어서가 아닐까.
예전에 박민규씨도 인터뷰 중에 회사에서 짤린 얘기 나오니까 막 울더라. 그러면서 그 때 얘기는 아직 소설로 쓰지 못하겠다고. 실제로 예전에 스포츠 잡지에서 레슬링을 주로 다뤘음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레슬링 소설은 쓰지 않을 거라고 공언하기도 했지.
원래 가슴에 유리조각이 많이 박히면, 사소한 자극에도 움찔하고 아파하고 그런다. 특히 그런 아픈 부분을 전문적으로 능숙하게 살살 간지럽히는 상업 작품을 보면, 아무리 신파조라고 욕을 해도 결국 눈물이 나오기는 매한가지 아닌가.
아 슬퍼. 나는 항상 주인공이 잘 되기를 바란다. 죽지 않고 행복하게, 오래오래 사랑하며 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