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 출판
07/01/25 14:34(년/월/일 시:분)
이번에는 미르기님이 주최한 모임에 갔다왔다.
http://mirugi.egloos.com/1496186
『천년여우 여우비』 개봉일에 같이 보는 모임.
이성강 감독은 지난 "마리 이야기"에서 다소 내용은 없지만 그래도 아름답기는 한 영상을 보여줬다. 그래서 이번에는 내용이 없었던 걸 좀 보완할 줄 알았는데... 지난번보다 심해졌다. 내용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말이 안 된다. -_-
영상도 아름답다. 음악도 잘 만들었다. 캐릭터나 세계관도 나름대로 신경 쓴 것 같다. 그런데 얘기가 말이 안 된다. 감정선이 어긋나는 정도라면 말도 안 해. 아예 논리적인 개연성이 없어. 기승전결도 없고. 주제도 뭔지 모르겠어. 아무리 애들 보는 거라지만, 애들도 이렇게 말이 안 되는 건 안 봐.
문제는 디렉팅이다. 영화가 어떻게 흘러가야 할지 방향을 못 잡고 있어. 난 처음에는 하도 영화가 두서없이 흘러가고 영상만 멋있으니까, 무슨 기술 데모를 보는 것 같았다니까. 아니, 영화가 이렇게 엉망으로 흘러가면 위에서 뭐라고 해야 되는 거 아닌가? 뭔가 의사전달의 체계가, 애니메이션이 산업으로서의 체계가 안 갖춰진 것 같다.
지난번 "원더풀 데이즈"의 실패도 있었고, 이제는 한국의 극장 애니메이션도 성숙해서 이번에는 좀 괜찮을 줄 알았다. 스탭들의 실력도 뛰어나고, 돈도 충분히 들어오고, 배급사도 괜찮아서 스크린도 꽤 확보했다. 김기덕 감독처럼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모든 조건이 호의적인 가운데, 벌써 10년 가까이 지속되는 고질적인 문제 하나. 재미가 없다.
이게 무슨 예술 영화도 아니고, 분명히 대중을 상대로 만든 상업 영환데, 가장 중요한 재미가 없다. 아니 내용이 재미가 없을만 한거면 그나마 이해를 해. 그런데 이 영화의 내용은 재미있게 만들면 얼마든지 재미있게 만들 수 있는 거란 말이야. 아니 조금만 다듬으면 재미있을 것 같은데, 결정적인 순간에서 어긋나고, 아슬아슬하게 비껴가고, 그러니까 영화 보면서 참 보는 내가 다 화가 나더라.
중간 중간에 애들 재미있으라고 일부러 다소 유치한 개그를 집어넣기도 했는데, 이건 애들이 보기에도 유치한 수준이다. 사실 애들을 웃기는게 제일 힘들지 않나? 나는 연소자 관람가가 그래서 가장 어렵다고 보는데. 애들이 어리다고 만만하게 보면 안 되지. 그런 면에서는 차라리 남기남 감독이 나을지도.
게다가 영화는 애들이 보기에도 유치한 부분과, 어른이 보기에도 이해하기 여러운 부분을 마구 넘나든다. 일단 주인공이 도대체 뭘 하는지도 파악이 안 된다. 정리를 해보자면
1. 외계인이 불시착해서 같이 산다. - 왜 같이 사는지 명확하지 않고, 고향 별로 돌아간다는 데도 별로 고민이 없다. 그럼 외계인은 왜 나왔어 -_-
2. 남자 주인공이 좋아한다고 고백한다. - 그런데 주인공은 남자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을 뿐더러, 그보다 여자 동료와의 우정을 강조한다. 그래놓고 마지막에 남자를 위해 자기를 희생한다. 왜? -_-
3. 수렵꾼이 구미호를 추적한다. - 곰이 나타나 도와준다. 그런데 경찰은 멀쩡한 마을에 반달곰이 나타나 아이를 구해주는데도 당연한 듯이 납득하고 돌아가고, 수렵꾼은 특별한 이유도 없이 퇴장한다. 어째서? -_-
4. 구미호는 환생한다 - 아마도 구미호는 아홉개의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설화를 바탕으로 한 것 같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그냥 주인공이 구미호다, 라고 자막으로 보여주고 더 이상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영혼을 하늘로 날려보낸 다음, 주인공과 머리 모양까지 똑같은 여학생의 모습을 보여주고 그걸로 끝이다. 그래서 뭘 어쨌다는 거야 -_-
아, 그만. 이 영화는 이렇게 트집을 잡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이렇게 따지기 시작하면 85분짜리 영화 중에서 40분은 쓸데없이 들어간 장면이고, 나머지도 제대로 내용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한참을 덧붙여야 한다. 정말 엉망이다.
하여간, 한국의 극장 애니메이션이 계속 이런 추세라면 앞으로도 재미있는 작품, 흥행하는 작품이 나오기는 어려울 것 같다. 아무리 영상이 뛰어나면 뭘 해, 재미가 없는 걸.
http://www.cine21.com/Article/article_view.php?mm=002001001&article_id=44266
사실 2006년의 <아치와 씨팍>을 거쳐 <천년여우 여우비>에 이른 지금, 한국 애니메이션의 기술적 발전을 상찬하는 것은 더이상 의미가 없다.
기술적인 토대는 충분하다. 문제는 이야기다. 확실히 <천년여우 여우비>의 시나리오는 좀더 세심한 영화적인 퇴고가 필요했을 법하다. 관객을 사로잡는 소박한 이야기는 중반을 지나면서부터 수많은 캐릭터들을 집어삼킨 채 결말을 향해 달음박질치고, 몇몇 조연 캐릭터들은 내러티브를 위해 희생되거나 오직 그림을 만들기 위해서만 삽입되어 있는 듯 느껴진다. 가끔은 부산스러운 이야기와 캐릭터를 향해 마리처럼 느긋하게 화면에 머물러달라 요청하고 싶어질 때가 있다. 이성강 감독은 <천년여우 여우비>를 통해 다시 한번 강렬한 비주얼리스트로서의 재능을 입증하지만 실사영화 <살결>로 보여줬던 내밀한 이야기꾼으로서의 면모는 아직 드러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