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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보수 프리미엄, 진보 페널티

12/12/11 00:52(년/월/일 시:분)

신혼여행을 미국으로 갔는데, 마침 대통령 선거라 TV에서 선거 방송을 잔뜩 해줬다. 그때 봤던 오바마와 롬니의 구도가 지금 한국의 대선과 비슷한 점이 많아 한마디 해본다.

1.

선거 전날 폭스 뉴스에서 오라일리 팩터를 봤는데, 오바마가 사소한 말 실수한 걸 가지고 마치 슈스케처럼 삑사리난거 무한 반복하는 것처럼 집요하게 반복 재생하면서 비판하더라. 정말 악의가 느껴졌다. 그걸 보고나니 왠지 그 선거일 전날 나오는 수많은 보수 논객들의 얼굴이 이상하게 일그러져 보였다.

난 무엇보다 폭스 뉴스 논객들의 넥타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통일교 교주 문선명의 넥타이 같았다. 문선명은 권위적인 짙은 빨간색에 무척 고상하고 복잡한 금박 장식이 들어간 넥타이를 즐겨 맷는데, 그 무게있게 권위적이면서 고상함을 뽐내고 싶은 마음이, 묘하게 촌스러운 문양과 함께 나에게 거부감을 줬다.

그런데 폭스 뉴스의 논객들의 넥타이도 그런 느낌이었다. 권위를 주고 싶은데, 그 무게감이 묘하게 촌스럽고 이상하다. 없는 권위를 이상하게 가져다 붙인 모양새다. 자기 만족감이 낮다보니 이런저런 컴플렉스만 덕지덕지 붙어서, 쓸데없이 잘난척을 하고마는 사람 같이 보였다. 그런 마음의 병이 보였다. 건강하지 않아 보였다.

그때 봤던 폭스 뉴스의 논객들과 똑같은 모양새로 요즘 종편 채널의 논객들이 나온다. 별 볼일 없는 얘기거나 이상한 얘기들을 끝도 없이 떠들어댄다. 물론 재밌게 보긴 한다. 종편은 앞으로 시청률이 계속 오를 것이다. 다만 미국은 채널을 돌리면 진보쪽 색채의 채널도 있는데, 한국은 언제쯤 그런 채널이 더 나올지 모르겠다.

보수가 나쁜게 아니다. 균형이 문제다.

2.

밋 롬니는 언뜻 보기엔 전혀 보수쪽 사람 같지가 않아 보인다. 내가 위에서 말했던 마음의 병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가장 보수같아 보이지 않기에 보수에서 내보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런 멀쩡해보이는 롬니도 입을 열면 이상한 얘기들을 시작한다. 논리적으로 모순이 있고, 가끔은 의도가 뻔히 보이는 위선적인 얘기들을 해서 화가 나기도 한다. 롬니가 본인이 그렇다는 걸 모를리가 없다. 그런데도 뻔뻔하게 그런 말을 계속 한다. 왜 보수는 뻔히 보이는 이상한 말을 할까? 본인들의 정책이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걸 과연 몰라서 그러는 걸까?

가장 압권은 TV광고였다. 내가 놀러갔던 플로리다 지역은 마침 스윙 스테이트라서, 선거 전날 선거 광고가 엄청나게 많이 나왔다. 그런데 공화당의 TV광고는 정말로 악의적이었다. 예를 들자면 오바마 대통령에게 한 시민이 "대통령님, 저는 (의료보험을 위해) 그런 세금을 감당할 수 없어요."라는 말을 하는 것이다! 병원비가 안나와봤구나!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런데 한시간에도 몇 번씩 그런 광고를 보다보니, 말은 안되지만 이상하게 호소력은 느껴졌다. 마치 IBK 기업은행 광고 같았다. 무척이나 친숙하지만 전형적인 보수로 보이는 송해 할아버지가 나와서 말도 안되는 얘기를 한다. "국민여러분, 기업은행에 예금하면 기업을 살립니다. 그리고 기업이 살아야 일자리가 늘어납니다." 한 마디도 말이 안된다. 근데 송해가 그런 말을 하니까 납득이 가기도 한다.

나는 이것이 보수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보수는 보수인 것 만으로 보수 프리미엄이 붙는다. 논리는 부족해도 전투력이 높다. 사람의 원초적인 감성을 자극한다. 아무것도 없는 사람에게 보수 딱지만 붙여줘도 왠지 없던 권위가 생긴다.

반면 진보는 진보인 것 만으로 진보 페널티를 받는다. 진보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건 말도 안되고, 어찌보면 반칙이라 치사해서 도저히 그렇게는 못한다. 스스로에게 제약을 거는 것이다. 진보는 진보인 것 만으로 스스로에게 저주를 건다. 진보는 그만큼 태생적으로 약한 면이 있다.

3.

롬니는 잘생기고 자신감있고 건강해보이는 것 말고는 딱히 장점이 없어 보였다. 솔직히 논리로 보나 정책으로 보나 명분으로 보나, 오바마에게 게임이 안되야 정상이다. 근데 그런 약해빠진 롬니에게 오바마는 무척이나 고전했다.

만약 공화당에서 롬니가 아니라, 오바마의 반 정도만 되는 인물이 나왔어도 게임이 안됐을 것이다. 만약 오바마 대 오바마로 진보와 보수가 싸운다면, 진보는 도저히 이길 수가 없다. 보수는 보수인 것 만으로 무조건 먹고 들어가는 게 있다. 빨간색 오바마가 파란색 오바마보다 쎄다.

마찬가지 일이 한국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우리는 이미 지난번 대선에서 이명박이 압승하는 것을 봤다. 만약 박근혜가 이명박의 반 정도만 됐어도 이미 게임이 끝났을 것이다. 진보는 태생적으로 원초적으로 약해빠진 면이 있다.

이번 대선후보 TV토론에서, 문재인이 박근혜에게 너무 정중하게 대하는 것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무척이나 답답했다. 물론 문재인은 그런 무한한 정중함으로 지금의 자리까지 오른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걸 탓하면 안되겠지만, 이렇게 약한 상대에게조차 이렇게 고전하다니.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원래 진보는 이럴수밖에 없는 건가?

그렇다고 해서 문재인에게 이정희같은 신랄한 네거티브를 기대할 순 없다. 문재인은 문재인 스타일로 끝까지 가는 수밖에 없다. 그게 선의의 힘, 진심의 힘이라고 생각하지만 참으로 답답한 싸움인 것이 사실이기도 하다.

4.

이정희를 보면서 통쾌함과 동시에 안타까움을 느꼈다. 아 저러면 안되는데. 낄낄거리면서도 마음이 불편했다.

나는 한국의 운동권, 특히 NL은 새누리당 이상으로 보수적이라고 생각한다. 위에서 말했던 보수 프리미엄의 강력한 전투력이 있다. 무엇보다 본인들의 생각이 옳다고 생각하면 어떤 경우에도 타협하지 않고 끝까지 밀어붙이며 본인들의 생각을 관철하고야 마는 면이, 어떻게 보수적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나는 이석기의 페이스북 사진첩을 봤다. 통진당 내분 사태 이후 열린 전당대회 사진이 있었다. 심상정 유시민과 대판 싸우고 남은 사람들이, 마음의 상처가 있을법도 한데 다들 후련한 표정으로 환하게 웃고 있었다. 마치 이석기를 연예인 대하듯 친근하게 사진을 찍고 있었다. 이석기 또한 무척이나 대범한 얼굴로 팬들과 함께 포즈를 취했다. 나는 정말로 강력한 팬덤을 느꼈다.

나는 생각했다. 이 사람들은 절대로 변하지 않을 것이다. 어떠한 시련과 고난이 닥쳐도 반드시 이겨내고야 말 것이다. 나는 이 사람들이 한국 인구의 2%를 차지한다고 생각한다. 일본의 오타쿠 비율과 비슷하다. 어떻게 보면 적지만, 어떻게 보면 적지 않다. 오타쿠를 겨냥한 애니메이션이 많지는 않지만 충분히 잘 팔리듯이, 통합진보당도 적은 듯 하지만 충분한 영향력을 확실히 행사할 것이다.

그럼 민주당에서는 2%를 얻기 위해 이 사람들을 통크게 감싸안아야 할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사람들의 안철수의 "상식" 프레임으로 볼때 비상식에 속한다. 그리고 이 글에서 내가 보여준 보수-진보 프레임에서도 보수에 속한다. 그러므로 함께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결론.

보수는 보수인 것 만으로 보수 프리미엄을 얻는다. 반면 진보는 진보인 것 만으로 진보 페널티를 받는다. 어떻게 보면 낙인이고 저주다. 처음부터 공정한 게임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보는 스스로에게 건 제약을 감수하고 정정당당히 이겨야만 한다. 여기에 진보의 어려움이 있다.

나는 그래도 그런 싸움이, 선의와 진심이, 지더라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가능하면 이겼으면 좋겠지만, 좀 더 강했으면 좋겠지만, 그렇게 멋지게 싸우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거기에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고 싶은게 솔직한 나의 생각이다. 화이팅이다. 건투를 빈다.

http://www.xacdo.net/tt/rserver.php?mode=tb&sl=2421

  • capho 13/02/17 15:36  덧글 수정/삭제
    대선 전에 작성하신 내용인데도 통찰력과 혜안이 돋보이시네요.
    특히 마지막 부분에서 기운을 얻어 갑니다.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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