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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작품들 - 스토리

지금은 없는 휴대폰을 위하여

08/04/13 15:36(년/월/일 시:분)

사랑하는 휴대폰에게.

너를 처음 만난 곳은 옥션이었어. 너는 흔히 말하는 버스폰이었지. 한정된 수량만 공짜로 잠깐 풀리고 사라지는 그런 떨이폰이 바로 너였어. 나도 솔직히 다른 것보다 공짜라길래 덥석 너를 낚아 챈 거였어.

하지만 쓰면 쓸수록 너는 정말로 대단한 녀석이었어. 7.9mm의 얇은 두께와, 배터리 포함 60g의 가벼운 무게는 하루 종일 바지 앞주머니에 넣고 다녀도 걸리적거리지 않았어. 게다가 공짜폰 주제에 기능도 대단했지. KTF 도시락으로 음악도 듣고, 동영상도 보고, 미니 영어사전도 있고, 멀티팩도 되고, 카메라도 되고, 자동응답도 되고. 안 되는 게 없었어.

매일이 새로웠어. 너의 매력은 알면 알수록 끝이 없었어. 나는 그 조그만 화면으로 커피프린스 1호점도 보고, 월 5000원으로 새로나온 음악도 무제한으로 끝없이 듣고, 월 3000원에 무제한으로 웹서핑도 했어. 조선일보도 무료로 받아봤고, 네이버 팝업으로 최신 뉴스, 날씨, 증권 정보도 무료로 받아봤어. 전에 쓰던 PDA폰의 기능이 무색할 정도로 너는, 만능이었어.

그러다가 나는 미국으로 1년간 어학연수를 갔어. 나는 너를 곱게 책상서랍에 넣어놨지. 갔다와보니 너는 완전히 구형이 되어 버렸지만, 나의 마음은변함이 없었어. 네가 늘 그리웠을 뿐이었어. 나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너를 다시 꺼내 썼지.

그런데 너는 몰라보게 달라져 버렸어. 배터리가... 배터리가 완전 조루가 되버린 거야. 1년간 한번도 사용하지 않았는데, 단순히 1년이 지났다는 이유만으로 배터리 수명이 엄청나게 짧아져버렸어. 요즘 배터리는 그렇더라. 사용하지 않아도 시간이 지나면 수명이 줄어들어.

배터리 문제는 심각했어. 1시간짜리 커피프린스 동영상을 보는데, 중간에 배터리가 다 닳아버리는 거야. 고민 끝에 나는 동영상을 30분씩 2개로 분할했지. 반 보고 배터리 갈아 끼우고, 나머지 반을 보는 식으로 해결했어.

그런데 이제는 20분만에 배터리가 닳아버리는 거야. 그래서 나는 이제 동영상을 20분씩 3개로 분할했지. 배터리가 2개밖에 없었기 때문에, 이제는 하루에 한 편을 다 볼 수가 없었어. 하지만 나는 그래도 너를 바꾸고 싶지가 않았어. 어떠한 방법을 써서라도 너를 조금이라도 더 쓰고 싶었어.

그런데 이제는 15분으로 줄어들었어. 동영상은 둘째 치고, 나는 하루에 통화를 15분도 할 수 없었어. 얼마 전에는 아주 오랜만에 반가운 친구에게 전화가 왔는데, 무심코 길게 통화를 하다보니까 갑자기 꺼져 버렸어. "배터리가 부족합니다"는 경고 메시지도 없이, 그냥 툭 하고 꺼져 버렸어.

나는 급하게 배터리를 갈아 끼우고 다시 통화를 했지. 그러나 이제는 10분만에 꺼져 버리는 거야. 하루에 10분도 통화를 못해! 나는 궁리끝에 중요한 통화는 공중전화로 해결을 했어. 중요한 전화가 오면 잠시만 기다려달라고 한 후에, 가까운 공중전화에서 다시 걸었어. 정말 구차한 방법이었지.

배터리는 날이 갈수록 수명이 줄어들었어. 10분, 7분, 5분... 도대체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위태로웠어. 배터리는 잔뜩 부풀어서 배터리 덮개가 제대로 닫히지 않을 정도였어. 완전히 늙어버렸지. 안그래도 TV에서는 배터리 폭발 사고가 계속 나왔고, 나도 통화를 하면 예전보다 금방 뜨거워지는 걸 느꼈어. 불안했지.

통신사에서도 압박이 들어왔어. 요즘에 3G로 넘어가면서, 기존 2G 사용자에게는 할인 혜택을 거의 주지 않는 거야. 지난번에 CGV에 갔더니 KTF 사용자는 2000원을 할인해 주더라구. 그런데 내 것이 옛날 2G 휴대폰이라서 할인혜택이 적용이 안 되는 거야! 이마트 할인도 안돼! 완전 찬밥 신세였어.

요즘엔 의무약정제가 생겨서, 3G 영상통화폰을 무료로 준다고 자꾸 전화가 오더라구. 하긴 나도 처음에 너를 공짜라길래 덥석 사버렸지. 하지만 왜일까? 공짜라는데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더라. 너를 처음 산 것도 공짜라서 산건데, 이번에는 같은 공짜인데도 별로 사고 싶지가 않아.

내가 너에게 반한 부분은 7.9mm의 얇은 두께와 60g의 가벼운 무게였어. 그런데 요즘 나오는 3G 영상통화폰은 다들 무식하게 두껍고 무겁더라. 3G가 전력을 많이 소모해서 배터리가 커진데다가, 동영상 모듈, GPS, DMB가 들어가고 액정이 커지면서 예전 너처럼 도저히 작아질 수가 없었던 거야.

시대는 변하고, 한번 앞으로 가면 다시는 뒤로 돌아가지 않아. 이미 얇고 가벼운 휴대폰의 시대는 지나버린 것 같아. 앞으로는 너처럼, 내가 정말로 사랑했던 너같은 얇고 가벼운 휴대폰은 아마도 나오지 않을 것 같아. 너는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가 되버린 거야.


사랑하는 휴대폰에게.

얼마 전 나는 휴대폰 수리점에 갔어. 배터리라도 새로 사볼까 해서. 다른 건 몰라도 하루에 10분밖에 통화를 못 하는 건 정말 아니었거든. 연락하는 친구들이 자꾸만 줄어들어서.

특히 배터리 2개 중 하나는 수명이 완전히 끝나버려서, 휴대폰 부팅하는 도중에 꺼져버리더라. 부팅을 할 전력도 남아있지 않았던 거야. 부팅하다 꺼져버리고, 다시 부팅하다 꺼져버리고, 그걸 혼자서 의미도 없이 반복하는 걸 보면서 나는, 이제는 더 이상은 안되겠다 생각했지.

그런데 배터리 가격이 2만 5천원이더라. 나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어. 사실 2만 5천원은 아주 비싼 가격은 아니야. 하지만 나는 너를 공짜로 샀었잖아. 그리고 요즘 3G 영상통화폰도 공짜로 구할 수 있어. 그런데 배터리가 2만 5천원이라니! 배보다 배꼽이 크잖아.

생각해봐. 배터리를 살 돈이면 휴대폰을 새로 사겠다. 사실이잖아. 나는 마음이 너무도 심하게 흔들렸어. 휴대폰을 새로 사는데는 돈이 안 들고, 배터리를 새로 사는데는 돈이 들어. 어떤 쪽을 선택해야 할지는 너무도 뻔하잖아?



나는 한참을 수리점에 앉아 있었어. 언제나처럼 너를 손바닥에서 빙글빙글 돌리면서. 습관적으로 완전히 내 손에 익은 너의 버튼을 무의미하게 눌러 보았어. 곳곳에 손때가 묻었고, 너무나 오래 사용해서 마치 내 몸의 일부인 듯한, 나의 분신, 휴대폰.

내가 이걸로 들은 노래만 몇천곡이야. 이걸로 본 동영상만 몇백개야. 매일 화장실에서 변을 보면서 작은 화면으로 모바일 조선일보를 보는 것도 큰 즐거움이었어. 가끔 급한 메일을 확인해야 할 때 지하철에서 모바일 웹서핑을 하는 것도 좋았지. 매일 아침마다 네이버 팝업으로 날씨를 확인하기도 했고.

하지만 그런건 새 휴대폰으로도 당연히 가능해. 아마도 새 휴대폰이 더 좋을거야. 굳이 아쉬워할 필요는 없어. DMB도 되고, 액정도 더 크고, 영상통화도 되고, 해외로밍도 되고, GPS도 달렸어. 좋은 쪽으로 가는 거야. 그런데 나는 무엇 때문에 망설이는 걸까.

하루에 10분밖에 통화를 못해서 공중전화로 뛰어가던 때.
커피 프린스를 보려고 배터리를 갈아끼우던 때.
부팅조차 안 될 정도로 배터리 수명이 달아버렸던 때.

처음 너를 박스 안에서 꺼냈던 때.
미국 갔다가 1년만에 너를 서랍에서 다시 꺼냈던 때.
배터리 경고음도 없이 갑자기 꺼져버렸을 때.

착 달라붙는 청바지 앞주머니에서 느껴지던 너의 작은 진동.
바꾸지도 않고 1년째 쓰던 기본 벨소리.


정말 미안해. 하지만 나는... 정말 이러려고 했던 건 아닌데... 미안해.



사랑하는 휴대폰에게.

나는 오랜만에 예전에 쓰던 모토로라 스타택 6000 시리즈를 꺼냈어. LCD도 아니라 빨간색 LED로 구성된 1줄짜리 화면, 추억의 SEND/END 버튼, 손으로 잡아뽑는 안테나, 무려 배터리 2개를 동시에 장착할 수 있는 독특한 구조. 전면에 기본 배터리를 달고, 보조 배터리는 등에 업고. 그러고보니 그 시절에는 정말 배터리를 많이 먹었지.

이제는 1G 아날로그 망이 서비스를 중단했기 때문에, 이 핸드폰을 더 이상 사용할 수 없어. 아마 언젠가는 2G 망도 마찬가지로 서비스가 중단되겠지. 그러면 이 스타택처럼 너도 완전히 무용지물이 될 거야.

그때가 되면 지금 내가 스타택을 오랜만에 꺼내보는 것처럼, 너를 다시 꺼내보는 날이 오겠지. 그러면 아마도 지금을 추억하며, 야 그때는 정말 이거 잘 썼는데, 정말 잘 썼는데... 그러겠지.

그때 다시 만나자. 그 언젠가 다시 꺼내볼 때까지, 책상 서랍 속에서 잘 쉬고 있어.

안녕.


(휴대폰을 서랍 속에 넣는다. 서랍을 닫는다.)


StarTAC 6000, MiTs M330, EV-K100

http://www.xacdo.net/tt/rserver.php?mode=tb&sl=1107

  • 1월의가면 08/04/13 17:19  덧글 수정/삭제
    저도 에븐이를 작년에 구입해서 지금까지 쓰고있습니다^^
    정말 얇은면에서는 어느누구도 부럽지않고 은근히 성능도 괜찮았는데
    유자드웹 정액을 시작한후부터 배터리수명이 급격히 달더니
    님처럼 심하지는 않아도 보통보다 두배는 빨리다는 조루폰으로 변화해버렸습니다;;

    그래도 한 반년은 더버틸려고요 ㅎㅎ
  • nedry 08/04/13 23:04  덧글 수정/삭제
    글 잘 읽고 갑니다. 저도 요 한달동안 핸드폰을 두번이나 바꾸면서... 이게 뭐하는 짓인가 하는 생각도 들고 우울했었는데..
    저도 제 핸드폰들한테 편지나 써줘야겠어요
  • 민트 08/04/14 13:22  덧글 수정/삭제
    조침문이 아니라 조폰문..??
    저도 에븐이 유저로써 공감이 가는군요. 방학때 잠깐 들어왔을때 기계값 다 주고 샀는데 다시 호주가서 뉴스기사를 보니 뭐 위피폰인가 거의 공짜에 주는 폰이 생기고 ㄱ-.. 하여튼 에븐이 살 때는 시기가 애매해서 별 혜택 없이 폰을 샀는데... 그래도 후회는 없습니다. 진짜 디자인은 킹왕짱, 기능도 딱 기본만. 아무리 3g로 간다고해도 이런 폰은 한두모델 정도 있어줘야 하지 않을까요... 다만 한가지 단점이라면 버튼 작은거..?? 그래도 저 역시 호주에서 폰 여러개 갈아치웠지만 돈이 있어도 사고 싶은 모델이 별로 없었는데 얘만한 폰이 앞으로도 거의 없을 듯.. ㅠㅠ (제 배터리는 1년 놀았어도 멀쩡하고 아직도 쓸만해서 최소 1년은 같이 더 할 것 같군요.)
  • xacdo 08/04/16 14:05  덧글 수정/삭제
    저는 그냥 배터리 샀습니다.
  • 동동 08/04/17 16:02  덧글 수정/삭제
    우와 작도 씨 멋집니다.
  • 이름 09/07/05 11:43  덧글 수정/삭제
    울었습니다.
  • 09/09/07 02:04  덧글 수정/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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