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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작품들 - 스토리

바나나 연작

06/06/04 16:39(년/월/일 시:분)

바나나 농장

옛날옛날에 작도라는 사람이 살았어요
작도군은 침대에 누워서 바나나를 먹는 것을 좋아했어요
한입 베어물면 입안 가득히 퍼지는 달콤하고 새콤하면서 달짝지근한 맛.
씹으면 씹을수록 깊은 맛이 느껴지는 바나나를 싫어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마 한명도 없을 거에요
특히 이 맛있는 바나나를 침대에 누워서 먹으면 그 맛과 편안함으로
마치 천국에 온 듯 황홀한 엑스터시를 맛볼 수 있어요

그러던 어느날 그는 생각했어요
이렇게 맛있는 바나나를 평생 먹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그는 필리핀에 있는 델몬트 바나나농장에 가서 일하기 시작했어요
매일매일 맛있는 바나나를 먹으며 그는 매일매일 성실히 일했답니다
하루가 가고 또 하루가 가고 매일매일을 바나나를 먹으며 성실히 일하는 작도군을 지켜보고 있는 할아버지가 있었으니 그는 농장주인 데낄라 할아버지였어요
올해로 80세를 맞는 데낄라 할아버지는 곧 은퇴를 하고 자식들에게 농장을 물려주려고 했지만 성실히 일하는 작도군을 볼 때마다 마음이 흔들리곤 하였어요

그러던 어느날이었어요
점심으로 나온 바나나우유를 보면서 한 일꾼이 말했어요
"아! 이젠 바나나가 아니라 바나나우유만 봐도 질려! 정말 싫어!"
이 광경을 목격한 작도군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 일꾼에게 소리쳤어요
"아니 뭐야! 이렇게 맛있는 바나나를 어떻게 질려할수가 있지? 보라고. 나는 짧지만은 않은 내 인생 21년동안 단 하루도 바나나를 먹지 않고 지나친 적이 없어. 바나나는 내 삶이자 나의 전부야! 자 보라고!"
하며 그의 바나나우유를 훔쳐 꿀꺽꿀꺽 원샷으로 마셔버리고 말았어요
다 마신 작도군은 입가에 묻은 우유자국을 마치 광고에 나올듯한 웃음을 지으며 닦았어요
"그대여, 나와 함께 바나나에 작은 한 몸을 불살라보지 않겠나."
그 일꾼은 이미 감동과 눈물로 흠뻑 젖어 있었어요
"작도군! 내가 잘못했네! 우리 함께 바나나에 한평생을 바쳐 세계를 바나나제국으로 만들어버리세!"
이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데낄라 할아버지는 지켜보고 있었어요
그래서 바나나농장을 작도군에게 물려주기로 결정했답니다

바나나농장을 물려받은 작도군은 필리핀에 콕 쳐박혀서 군대도 안 가고 매일매일 바나나만 실컷 먹으며 여생을 행복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2002년 1월 16일

주) 군대가기 전, 조마조마하며 썼던 글이다.


바나나 페티쉬

그것은 마치 바이러스와 같다. 옆에 있는 것 만으로도 전염된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옆에 있는 사람이 바나나를 먹는 걸 보는 것은. 바나나의 탐스러운 껍질을 마치 여인의 속옷을 벗기는 모양으로 살포시 조심스럽게 귀중한 물건을 다루는 것처럼 부드럽게 벗겨낸다. 노란 껍질 안으로 드러나는 은은한 베이지색의 속살. 겉은 까칠까칠하지만 그 안은 부드럽기 이루 형연할 수 없어 한입 깨물면 달콤하면서 새콤하면서 달짝지근한 향미가 온 입안을 가득 채우며 절로 군침이 돌게 한다. 보는 나에게까지 그 맛이 전염된다.

나는 옆에서 보는 것 만으로 바나나가 먹고 싶어진다. 그래서 나도 바나나를 사서 그 사람이 했던 것처럼 바나나를 먹고 싶다. 바나나를 한포기 사와서 바나나 하나를 따서 바나나 껍질을 벗겨보지만 이건 여인의 속옷을 벗기는 느낌이 아니라 아줌마의 속옷을 벗기는 느낌이다. 나이에 안 맞게 괜히 야한 속옷을 입어 구질구질한데 어쩔 수 없이 벗겨야 하는 기분이다. 일단 참고 껍질을 벗겨보지만 그 안에서 나타나는 건 은은한 베이지색 까칠까칠한 속살이 아니라 마치 50대 아줌마의 노화한 쭈글쭈글한 피부를 보는 듯 흐물흐물한 모양이다. 한 입 베어무는 순간 입안에 가득 퍼지는 텁텁함과 떫음과 시큼시큼한 향취는 마치 구토물을 바닥에 머리를 대고 핥아먹는 듯한 역겨움을 준다.

나는 도저히 바나나를 더 이상 먹을 수 없었다. 어떻게 그 사람은 그렇게 바나나를 맛있게 먹을 수 있었던 것일까. 나는 궁금하여 내 옆에서 바나나를 먹던 사람에게 물었다.

"당신은 어떻게 그토록 맛있게 바나나를 먹을 수 있는 것입니까?"
"아니, 나는 바나나가 떫고 시큼털털해서 맛이 없는데 어떻게 당신에게는 내가 맛있게 먹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까? 나는 이해할 수가 없군요."

나는 놀랐다. 내가 맛있게 먹고 있다고 생각한 사람은 사실 맛없게 먹고 있었다는 것인가. 내가 먹어도 맛이 없고 저 사람이 먹어도 맛이 없는 바나나가 맛있게 느껴진 것은 순전히 내가 그 사람이 먹는 것을 보는 과정에서 생겨난 하나의 오해였을 뿐인가. 그렇다. 그렇구나. 그랬었던 것이구나.

그 후로 나는 바나나는 먹지 않고 그 사람이 바나나 먹는 것을 보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다. 내가 바나나를 맛있게 먹는 방법은 간단하다. 바나나를 사서 그 사람에게 준다. 그리고 나는 그의 먹는 모습을 감상하면 되는 것이다.

2002년 1월 22일

주) 이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예를들어 나는 축구를 좋아하진 않지만, 축구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좋아한다. 그래서 축구 규칙도 모르면서 인터넷에 올라오는 댓글을 하나하나 꼬박꼬박 봐 주는 것이다.

http://www.xacdo.net/tt/rserver.php?mode=tb&sl=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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