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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천하

존재 자체가 축복인 만화

천상천하 - 마야
어휴 뭔놈의 팬클럽 이름에 천상천하가 그리 많은지 원.. 이미지 찾느라 진땀뺐다.

때론 이런 작품이 있다. 얼마나 대단한 작품인지, 그 작품을 제대로 따라하기만 해도 100% 성공할만한 작품. 예를 들면 유리가면이 있다. 유리가면은 엄청나게 대단한 만화라서, 조금만 제대로 따라하면 누구나 성공을 보장받는다. 유리가면과 내일의 죠에서 보여준 열혈물의 전형성은 많은 아류작을 낳았고 급기야는 '스포츠물이나 전문직업 물은 무조건 중간 이상은 재밌다'는 편견을 낳을 정도로 정형화 되어 버렸다.

또 예를 들자면 "네모네모 스펀지 송 Sponge Bob Square Pants"가 있다. 미국식 코미디의 완성형을 보여주는 이 만화는 무진장 웃기다는 거 하나밖에 없는 만화다. 만약 당신이 이 만화의 유머감각을 조금이라도 비슷하게 모사할 수 있다면 이미 성공은 당신의 것.

문제는 유리가면이나 스펀지 송이나, 그 자체로는 상당히 뛰어나지만, 따라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유리가면의 엄청난 수준의 연출력이나 스펀지송의 고도의 유머감각을 따라한다는 것은 정말로 쉽지 않다. 분석하지조차 쉽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경지에 오른 그런 대단한 작품들의 비결은 아마도 작가 조차도 내가 어떻게 이런걸 만들게 되었는지 알 수 없는 수준일 것이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이거다. 실은 글을 쓰다가 이 표현이 이제서야 떠올라서 이 쉬운 말을 뱅뱅 돌려서 한거다. 천상천하를 보다가 문득 든 생각이다. "야 이 만화 대단하다. 내가 설령 이 만화의 아류작 정도만 그려도 꽤나 인기있겠다." 하는 것이다.

보통 아류작은 대접을 못 받는다. 인기도 별로 없다. 하지만 그 아류작도 엄청난 대작의 아류작을 한다면 얘기는 달라질 것이다. 예를 들면 '유리가면의 아류작'이라는 말을 듣는다면 그건 오히려 칭찬이다. 왜냐하면 보잘것없는 소인배의 작품이 감히 유리가면님과 비교되는 영광을 누렸기 때문이다. 내가 그들의 발끝이라도 다다르게 된 것을 축복으로 생각해야 할 지경이다. 나는 이런 느낌을 이 만화 '천상천하'를 보면서 느꼈다.

정말로 따라하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아 이 얘기였다. "교재"로 삼고 심을 지경이었다. 지독히 탐미주의적인 폭력 묘사. 이것 하나만으로 나머지 모든 것이 무시된다. 피가 튀고 근육이 파열되는 무시무시한 장면을 보면서 내 입에서 "아름답다.."는 말이 나올줄은 나조차도 상상하지 못했다. 이 비장미. 잔혹한 아름다움.. 내가 지금껏 보아온 어떤 만화에서도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비장미. 이 간단한 단어를 이해하기 위해 미학책을 샀던 적이 있다. 도대체 비장미가 뭐길래 하는 생각에 서점에 가서 아무 생각없이 '미학'이라는 제목의 책을 샀다. 참 제목도 심플하고 표지도 심플했다. 하지만 내용은 심플하지 않았다. 막상 페이지를 넘기면 그 곳에는 다른 세계가 있었다. 도저히 이 세상 언어라고는 믿기지 않는 언어가 나열되어 있었다. 나는 총력을 다해 17페이지 정도를 보다가 포기했다. 내 생애에서 책 읽다가 때려친 적은 그 미학책과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그리고 자아를 잃어버린 현대인, 짜라투르스는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총 4권이다.

하여튼 그 후로 여전히 '비장미'라는 단어는 나에게 오리무중이었다. 그 단어 하나 이해하려고 그 전화번호부를 연상케 하는 불가사의한 미학책을 다시 들여다볼 생각을 하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 후로 '여명의 자동눈눈동자'에서 가슴절절하게 아름다운 장면을 볼때도, 수많은 대하드라마에서 마지막 장면 으아 저렇게 비참하게 아름다울수가 하는 장면을 보면서도, 내 가슴속에 각인된 비장미라는 단어는 쉽게 잊혀지지 않았다. 도대체 저게 왜 슬프고 아름다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야기는 계속된다. 클램프의 X를 볼때도 나는 비장미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아이노 쿠사비의 마지막 장면을 볼때도 나는 비장미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그리고 천상천하를 볼때.. 나는 비로소 비장미라는 단어의 의미를 깨닫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내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비장미를 만들기 위해서는 어떤 규칙대로 무언가를 구성하면 언제 어디서나 그런 비장미가 만들어진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려운 미학책을 보고 그런 비장미의 규칙성을 발견하려고 했던 것이었다. 즉 그 규칙만 알면 나는 비장미를 '생산'해낼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실제로 보면 비장미가 나타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이거는 의도를 가지고 만든다고 해서 만들어지는 성질의 미가 아니었다. 예를 들어 일반적인 신체의 아름다움을 표현한다면 인체의 황금률을 따져서 미형의 신체 비율을 아그리파를 깍으면서 수련하면 얻어질 수 있지만, 이 비장미라는 것은 그런 교과서적인 내용도 없고 아무것도 없다. 이 세상에는 육체적 아름다움을 가진 이는 많다. 마음만 먹으면 얼굴 예쁘장한 아가씨 정도는 어디서 쉽게 주워올 수 있을 정도다. 하지만 끼가 있고 매력이 있는 아가씨는 정말로 구하기 힘들다. 비장미는 그런 끼와 같은 것이다. 어떤 규칙을 가지고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우연히 발견한 것을 잘 수집해놨다가 나중에 하나하나 써먹는 것이다.

비장미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수집했다가 하나씩 써먹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비장미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엄청나게 많은 말을 지어내야 된다. 이것저것 앞뒤가 안맞는 상황을 말이되게 적당히 둘러대야 한다. 즉 비장미의 작법은 말이 안되는 것을 말이 되게 만드는 식으로 진행된다. 그래서 천상천하의 스토리가 허술한 것이다.

문제는 이 천상천하라는 만화가 워낙에 뽀대를 소중하게 생각하다보니 스토리의 완성도에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만화를 보면 알겠지만 이 작가는 지금까지 자기가 수많은 경험을 통해 수집해 놓은 비장미라는 카드를 수도없이 꺼내서 여기저기에 처박는다. 덕분에 나는 수도없이 비장미의 오르가즘을 느낄 수 있었다. 만화책을 슬근슬근 넘기다보면 어느새 나는 온 몸이 굳는다. 어느 특정 장면을 만나면 갑자기 책장 한장을 넘길 힘마저 상실한다. 한동안 그 앞뒤 장면을 뒤적거리면서 "이 장면이 도대체 왜 나왔지?" 하고 열심히 이해하려 하다보면 어느새 아까의 오르가즘이 사라져 버린다. 아아 그렇다. 이해하려 들면 안된다. 장면을 보고 "멋있다" 생각하면 끝이다. 처음부터 그걸 노렸고 내가 반한 부분도 바로 거기다.

어쩌다보니 나는 이 만화를 마치 일러스트 집을 보는 느낌으로 보게 되었다. 이 경험은 코게 돈보씨의 '피타텐'을 볼때도 그랬던 것이었다. 스토리나 캐릭터나 설정이나 하는 모든 것이 단순히 '멋진 장면' 몇 컷을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니까 특정 장면을 만들기 위해 스토리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즉 이건 스토리가 주가 아니라 장면이 주다. 스토리가 장면의 하녀가 되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경우가 영화계에 있다. 매트릭스다.

어느 멋진 장면이 있다. 그런데 그게 말도 안된다. 그러면 이유를 만들어야지. 그게 말이 되도록. 그러다보니 내용이 어려워진다. 복잡해진다. 즉 일단 장면을 만들어놓고 스토리를 갖다 붙이다보면 필연적으로 내용이 어려워진다. 매트릭스가 그랬다. 피타텐도 그랬다. 천상천하도 그렇다.

그런 탓에 작가는 이게 내용이 어려워지든 말든 별 상관을 안한다. 어차피 이거야 다 말도 안되는 장면 갖다 붙이려고 만든 것 뿐이니까. 거기서 잔재미가 생긴다면 좋겠지만 아니라도 상관없어.

천상천하를 보자. 이 인간은 맨날 격투게임만 하고 살았는지 무술쪽에 박학다식하다. 유도나 검도 레슬링 정도는 기본으로 힙합에 드래곤볼에 판타지에 기공에 권법에 무협에.. 하여간 격투로 갖다붙일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안 가리고 다 갖다붙인다. 그러다보니 당연히 말이 안된다. 이걸 제대로 믹스한다면 이쪽 세계관을 만들어 "격투계의 톨킨"이라는 소리를 듣겠지만 그정도까지 능력이 되는 건 아니고. 어찌‰怜?멋진 장면이 나왔다면 그것으로 만족. 더이상의 설명은 없다.

내가 특히 놀란 것은 바로 이 만화에서 박무직씨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내게 박무직씨는 서태지와 비교된다. 나는 그들을 좋아했다. 나는 그래서 내가 박무직씨의 만화를 좋아하는 줄 알았다. 아니었다. 나는 박무직씨가 좋아했던 만화를 박무직씨를 통해서 좋아하는 것이었다. 이건 일종의 "출발 비디오 여행"같은 것이었다. 짧은 시간동안 각 영화의 재미있는 부분만 골라서 슬쩍슬쩍 보여준다. 그럼 정작 나중에 그 영화 볼때 재미가 없다. 배신감이 든다. 마찬가지의 기분을 나는 박무직씨에게 느꼈고 서태지에게도 느꼈다.

어찌‰怜?박무직씨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나보다. "야, 이 만화는 아류작만 되도 성공하겠다" 라고.. 정확한 묘사에 적절한 과장과 생략. 무시무시할 정도로 정교한 묘사. 미쳐버릴 것 같았다. 나는 박무직씨의 'TOON'에서 이런 대사를 읽은 기억이 있다. "때론 기술이 사람을 감동시키기도 하지." 그것은 바로 천상천하를 두고 한 말이다. 이 만화의 인체를 보고 있으면 감탄을 넘어 감동이 온다. 출렁 출렁 감동의 파도가 밀려온다.

..지금까지 오버가 심했다. 어찌‰怜?이 만화는 최고다. 많은 헛점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무진장 멋진 만화다. 오오구 레이토 대왕마마.. 이 세상에 강림하신 것을 감축드리옵나이다.

write 2003 07 04


부록 - 중국어가 배우고 싶을때 & 영어를 더 잘하고 싶을때

오오구 레이토 - 비단 채찍 Extreme (중국어)

...난 항상 이런 식이지 뭐.

요즘 한창 빠져있는 오오구 레이토 (Oh! Great) 씨의 만화를 수집하던 중,
저작권 개념이 희박한 탓인지 중국 쪽 자료가 구하기 쉬웠다.

근데 이게 차라리 영어나 일본어면 모르겠는데, 중국어는 좀..
아무리 고등학교때 제2외국어로 중국어를 했다지만..

아, 저기 我的가 my라는 뜻인건 알아.

오오구 레이토 - 비단 채찍

그래서 지금은 영어버전을 구해서 보고 있긴 하지만..
17쪽 읽는데 30분씩 걸린다 헉헉..

뭔놈의 sex comic이 이리 대사가 많아 -_-+

오오구 레이토 Oh! Great

1999년. 회사원이었던 그는 카드빚에 시달려 성인만화계에 입문했다는 소문..
어찌‰怜?오로지 돈버는 것이 목적이었던 만큼 그의 만화는 말초신경 자극 위주로 흐르게 되는데 이게 (역시 작가가 절박해서인지) 상당히 뛰어나서 호평을 받는다. 특히 미국에서 발매된 단편모음집 Silky Whip은 명작으로 대우받을 정도. 속편격인 Silky Whip Extreme (Junk Story)는 OVA화까지 되었을 정도. 요즘은 더욱 돈을 벌려는 속셈인지 청년만화계로 진출하여 '천상천하'같은 탐미주의적 격투만화를 그리고 있다. 홀딱 반해버림♡

write 2003 07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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